- 분노, 우울 죄책감과 함께 행복도 있더라
- 간질지속상태 유진이의 엄마 김신애 씨①
- 2011.11.30 22:31 입력 | 2011.12.01 10:28 수정
이 땅에서 장애인부모로 살아가는 건 어떤 모습일까? 장애가 있는 자녀의 성장과 함께 변해가는 부모의 삶에 초점을 맞춰 그 속살을 들여다봤습니다. 비마이너는 장애아를 키우는 어머니, 아버지 네 분을 만나 인터뷰했습니다.
![]() ▲간질지속상태라는 희귀병을 앓는 딸 유진이를 키우는 엄마, 김신애 씨. ⓒ김윤섭 |
이름 김신애. 43세. 경상북도 울진. 남편과 두 딸. 97년생 첫째 딸이 간질 지속 상태라는 희소병을 앓고 있음.
“장애인 부모 취재하면 행복하단 말 안 하던가요? 남편이랑 나랑은 날마다 행복해 춤추고 살아.”
울진 바닷가 근처의 한 식당에서 회덮밥 먹다 말고 별안간 내던진 김신애 씨의 한마디였다. 그녀는 나를 서울에서 내려온 장애인 전문기자로 대우했지만, 사실 나는 풋내기인데다가 장애인운동판에도 어정쩡한 인맥으로 기웃거리는 외부자에 가까웠던 터라 점심을 대접받는 내내 내가 모르는 장애인 관련 용어가 나오면 어쩌나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아니 그런데 이런 말을 이렇게 쉽게 해도 되는 걸까? 인터뷰 끝날 즈음, 결론을 대신해야 할 듯한 말을 만나자마자 너무 소탈하게, 아무 말 아니라는 듯이 내뱉으니 나로서는 허탈할 수밖에.
그녀는 첫 만남부터 사람을 편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상대방을 극진히 배려하기보다 그냥 옆에 있는 것 자체가 편한 상대랄까. 스스로 편하니 남도 편해지는 스타일이다. 말투는 거침없으면서도 편안하고 외모는 강해 보이면서도 푸근했다. 회덮밥 한 숟가락에 고추장 냄새 풍기는 행복. 김신애 씨에게 행복은 밥 먹는 것만큼이나 일상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행복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사람이구나. 이 사람에게 행복이란 삶이란 말과 다름이 없구나. 그녀의 첫인상은 이랬다.
청년 시절
김신애 씨는 육상선수였다고 한다. 고교 시절 100미터를 11초 7에 주파했다. 체육계에 만연한 폭력과 구타가 싫어서 선수생활을 과감히 포기한 후로도 그녀는 운동을 즐겼다. 어쩌면 건강하고 모험심 많은 그녀의 성격은 어렸을 때부터 줄곧 해왔던 운동 덕분일 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남편과 결혼하게 된 것도 사실 운동 때문이다. 당시 그녀는 등산을 무척 좋아해서 퇴근 후 곧바로 산으로 가 야영하고 다음날 회사로 출근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단다. 선을 보고 애프터를 신청하는 남자에게 그날 나 등산 가는데, 라고 했더니 그 남자도 그럼 같이 가자고 했다. 그녀는 장난삼아 청도 운문산 정상에서 12시에 만납시다, 이랬더니 그 남자가 진짜 왔더란다.
이 남자는 레펠, 독도법 등 자신보다 산을 더 잘 알고 있었고 어디 등산뿐인가. 탁구로 시작해 수영, 스키, 패러글라이딩, 스킨스쿠버 등 자기보다 더 많은 운동을 꿰뚫고 있었다. 만남은 초스피드로 진행되어 두 달 만에, 고작 네 번째 만남에서, 신랑과 손잡는 것도 어색해하면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사실 남편이 공수부대 출신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고.
그녀의 딸 김유진
이렇게 96년에 결혼해 97년 12월에 첫 아이를 낳는다. 김유진. 태어난 지 4년 만에 아이는 난치병에 걸린다. 병명은 바이러스성 뇌염으로 인한 간질지속상태. 그 후유증으로 지적장애, 전신마비, 경련성 질환이 있다. 매일 경련을 일으키기 때문에 다섯 가지 경련 약을 아침저녁으로 먹는다. 자기 이름도 모르는 심한 지적장애가 있다. 아니, 아는지 모르는지도 알 수 없다. 유진이의 인지 능력은 위험한 것을 피해 다니는 것 정도이다. 또 발이 마비돼서 거의 기어 다닌다. 섭식장애 때문에 배에 구멍을 뚫고 튜브를 통해 영양을 공급한다.
![]() ▲앨범 속에 담긴 유진이의 돌사진, 아프기 전 모습이다. ⓒ김윤섭 |
![]() ▲다섯 살, 고열에 시달린 아이는 간질지속상태라는 희귀질환을 얻었다. ⓒ김윤섭 |
김신애 씨는 유진이가 아프기 시작한 날을 정확히 기억했다. 2001년 10월 15일. 그러니까 십 년 전 가을, 유진이가 다섯 살 되던 해이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찬바람이 불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어린이집을 보내는데 잠바를 입혀 보낼까 하다가 에이, 낮에 더운데 하며 그냥 티 하나 입혀 보냈다. 그것이 화근인지 알 수 없지만 그날 저녁 아이가 아프기 시작했다. 춥다며 자리에 누운 아이에게 엄마는 감기인가 보다 하고 병원에서 감기약과 해열제를 지어 먹였다. 이틀 후 17일 아침, 열은 떨어졌지만 아이가 10시가 되도록 일어나질 않았다.
“애가 안 깨는 거예요 그래서 억지로 깨웠는데, 눈을 이렇게 뜨고는 엄마 잠이 와…, 그게 끝이에요.”
그때만 해도 이 말이 유진이의 마지막 말일 줄은 몰랐다고 한다. 부모는 아이가 깨지 않자 그때서야 보건소로 데려갔다. 침대에 누운 아이가 별안간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아무것도 모르던 부부는 아이가 깨어났다며 좋아했다. 하지만 의사는 아이가 경기를 일으키는 것이라며 당장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고 영문도 모른 채 구급차를 타고 경주 동국대 병원의 소아신경과에 갔다. 그곳에서 의사에게 오늘 밤을 못 넘길 수도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냥 아이가 감기 걸려서 열이 좀 났던 것뿐인데, 그 상황을 받아들일 부모는 없었다. 죽더라도 해볼 건 해보자는 심정으로 또다시 구급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아산병원에 입원했다.
그 후 일 년 동안 유진이는 서울 아산병원 소아중환자실에서 지냈다. 의사들의 최종진단명은 ‘바이러스성 뇌염으로 인한 간질지속상태’. 한마디로 계속 경련을 하다가 죽는 병이다. 뇌염의 원인은 너무도 흔한 장 바이러스. 치료를 위해서 뇌사상태로 만들어 경련을 멈추게 하는 강력한 약물을 투여했고 그 후유증으로 현재의 유진이가 되었다.
불편한 감정들과의 동거
“우리 딸 또래의 다섯 살 여섯 살 이런 애들이 지나가면 가서 때려 주고 싶었어요. 왜 너는 멀쩡하니. 이유 없이 그 아이를 미워하고 막 때려야 할 것 같은 생각이 치솟고… 그때는 기억이 안 나요. 도저히 제정신이 아니었어. 아무런 기억도 안 나고 그냥 우울하고 화나고 그랬어요.”
사실 이렇게 활발하고 건강해 보이는 김신애 씨가 우울증을 앓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장애인부모회 활동을 시작하기 전 약 3년간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물론 아직도 그녀에게 우울증은 현재 진행형이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하면서도 그녀의 말투는 경쾌하다. 마치 우울증을 겪어본 적이 없다는 듯. 아니 우울증이라는 것이 원래 그러하다는 듯이. 그녀는 애써 우울증을 떨쳐내려고 발버둥치기보다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편이다.
“내가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근데 분노가 없느냐, 분노가 있어요. 우울함이 없느냐, 아니에요. 시월만 되면 늘 우울해요. 그리고 죄책감도 있고 피해의식도 있고… 근데 영원히 그런 심리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런데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진짜 행복하다고 느껴.”
어쩌면 그녀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오늘은 어떤 감정들이 나를 찾아올까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우울증을 기다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감정들이 힘들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적어도 겸허하게 그 감정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그 불편함도 내 것이고 죽을 때까지 같이 내 몸뚱이를 나눠 써야 하는 동반자라는 것을 몸소 경험한 것이다. 자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과 정면으로 마주하기. 그런 용기를 매일 꿈 꿨던 나이기에 앞에 앉아 있는 김신애 씨가 내 눈에는 진정 삶의 달인이자 고수처럼 느껴졌다.
![]() ▲유진이는 배에 연결한 튜브를 통해 '밥'을 먹는다. ⓒ김윤섭 |
![]() ▲엄마와 먹은 밥상을 치우는 김신애 씨 둘째 달 유림이. ⓒ김윤섭 |
울진장애인부모회 활동
하지만 그렇다고 김신애 씨가 우울증에 취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반대로 아주 부지런히 움직였다. 유진이가 학교에 입학한 후 여유시간이 생기자 그녀는 봉사활동을 했다. 동네의 할머니를 병원에 모셔다 드리는 일을 시작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했고 그 후 울진장애인부모회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울진장애인부모회는 김신애 씨가 주축이 되어 2006년 구성되었다. 그녀는 우선 부모교육에 힘을 쏟았다. 울진의 장애인 부모들은 대부분 노인이어서 인권, 복지 등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다. 인권을 이야기하면 그런 엉터리 같은 것이 어디 있느냐는 타박을 들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의 분들이었다. 이런 분들이 차츰 마음을 열고 인권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런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데리고 서울 집회에 참가하고 온다고 한다. 어르신들은 서울 가서 빌딩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좋아하신다고.
부모교육은 자연스럽게 어린이들의 장애인식개선 사업과 연결되었다. 교육받은 장애인 부모들이 자녀들의 학교에 가서 강의하는 프로그램으로 발전된 것이다. 60이 넘은 할머니가 아이들에게 지체장애 때문에 취업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아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삶에서부터 나오는 생생한 장애체험의 언어가 아이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그러면 소감문을 쓰면서 아이들이 엉엉 울 정도로 효과적인 장애인식교육이 된다. 김신애 씨는 이 외에도 다양한 방식의 시도를 통해 교육사업만큼은 서울의 어느 단체 못지않게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고 강한 자부심을 보였다.
울진장애인부모회는 교육 사업뿐만 아니라 각종 상담, 장애인 지원 사업, 예산분석 및 정책제안 등 많은 일을 해오고 있다. 부모회 일뿐만 아니다. 그녀는 정말 바쁘게 산다. 활동하면서 공부의 필요성을 깨닫고 상담심리학 대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임상치료도 나가고 있다. 또 최근에는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던 역사공부를 하면서 봉평 신라비 전시관에서 해설 자원봉사를 한다. 그녀는 이런 활동들을 통해 ‘분노’를 좋은 방향으로 풀게 되었다고 말한다.
“지금은 다른 장애인 부모님들을 교육하고 그 마음을 공감해줄 만큼은 회복됐어요. 장애인 부모 교육에서 미술심리치료를 했을 때도 진짜 도저히 정상적인 인지를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그림을 장애인 부모님들이 그리는데, 가슴이 아파서 한 시간 내내 엄마들과 같이 울었어요. 엄마들이 그러고 나서 속이 시원해졌데. 나도 속이 시원했어.”
(2회 기사에 계속됩니다.)
*글쓴이 모기 님은 서른살 만년백수로 영화와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할 일 없는 요즘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글, 연극, 퍼포먼스 등으로 남일에 끼어들기를 좋아합니다. 장판에도 가끔 기웃거리며 참견 아닌 구경을 하다가 어찌어찌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진 찍은 김윤섭 님은 몇 해 전까지 국가인권위원회가 펴내는 월간 <인권>의 사진기자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매체에 기고하며 사진교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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