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쓴건 아니고..ㅋ
예전에 네이버메인에 뜬거 퍼온겁니다.ㅋ
저도 짱구 5살부터 팬이여서 아직도 식지않은 짱구사랑 ㅋㅋ
지금도 투니버스에서 방송해주면 챙겨보고ㅋ
(이제 대학생인 주제에;;)
지금 집에 크레용신짱 10권이나 있다는 ㅋ
2007년 11월의 어느 날 오후 6시.
언제 가을이 있었느냐는듯 바람의 온도가 척, 척 내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신주쿠 역 남쪽 출입구... 바쁜 발걸음을 옮기는 퇴근길의 사람들 사이로 선생을 기다렸습니다.
설레인 반, 기대 반...
역의 출구 쪽에는 거리의 악사들이 돌아 가며 라틴 음악, 블루스, 재즈를 퉁겨내고,
구경하며, 박수치며, 춤까지 따라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뒷통수를 물끄러미 바라 보다 6년 전 우스이선생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습니다.
지방 한 소도시의 애니메이션 영화제 프로그래머를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던 당시...
서울이 아닌 대한민국에서 '국제'라는 타이틀을 달고 무슨 일인가를 해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뼈져리게 실감하며 행사를 준비하다 문득 '오기'같은 것이 발동했습니다.
행사를... 홍보도 해야 하고 내실도 기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대중들에게 꽤나 알려진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초청해야 하고
거기에 걸맞는 게스트들도 초청을 해야 하는데,
행사의 역사도 짧고 예산도 넉넉치 못한 상황에서 뭔가 획기적인 돌파구가 필요했었습니다.
무모하다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세계적인 작품과 감독들에게 초청장을 보내고 있었지만,
번번히 거절당하고 사양당하고 있었습니다.
무모했지만 정성을 다했고
비웃음을 사기도 했지만 최선을 다해 편지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우리에게 날아 든 반갑고도 놀라운 소식...
<짱구는 못말려>의 만화가 우스이요시히토선생께서 직접 방문을 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찌나 반갑고 고마웠던지...
'영향력'이라고 해야 할지...
'인지도'라고 해야 할지...
<크레용신짱/짱구는 못말려>를 싸고 도는 뭔가 이상 야릇한 사회적 분위기와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가장 걸맞는 손님을 초청하게 되었다는 뿌듯함이
내부에서 빠르게 겹쳐지는 것을 느끼며 선생을 기다렸던 그 곳...
그럴듯한 상영장이 없어 낡은 어린이회관의 공연장을 개조해 만든 엉성하기 짝이 없었던 상영관.
그 허름한 분위기 속으로 선생은 불쑥, 커튼을 젖히고 들어 오셨더랬습니다.
그리고... 그 곳으로 달려 오시며 내내 연습했음직한 우리 말 인사를 내놓으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짱구는 못말려의 만화가 우스이요시히토입니다..."
소박한 인상의, 수줍은 인상의,
어떻게 저런 분이 그런 개그 만화를 그려낼까 궁금해질 정도로
선생은 부끄러움을 감추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감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 해, 이웃 나라 작은 도시의 한 행사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어 주신 선생의 따뜻한 마음씨를 모두 고마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도 딱 이만큼 서늘한 바람이 귓가를 맴돌던, 겨울의 문턱이었습니다...
선생은 부인과 함께 나오신 터였습니다.
반가운, 어찌 보면 서툰 6년만의 인사를 나눈 선생께서
한국 방문 때 드셨다는, 맛있는 불고기를 이야기하시며 신주쿠의 한 음식점으로 안내했습니다.
음식점으로 이동을 하며 사모님과 나란히 걷게 되었는데, 짧은 일본어로 몇마디를 전했더니,
부인께서 이런 저런 어휘의 우리 말을 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알고 봤더니 사모님은 <겨울연가>와 배용준과 박용하의 열혈 팬...
이런 저런 한류 드라마를 꿰찬 열혈 한류의 주인공이었던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는 기본이었고
'맛있어요!', '천만에요~', '괜찮아요~'같은 말들이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겨울연가> 촬영지를 보고 싶어 춘천과 남이섬을 가 본 적도 있다는 사모님은
내친 김에 한국어 학원까지 등록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모님의 한국 사랑은 인터뷰 내내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재탄생했습니다.
철판구이라 번역된 말보다는 '데판야키(鉄板焼き)'가 더 어울리는 그 곳에서
일행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마주 보는 자리가 아니어서 조금은 불편했지만
차라리 길게 앉은 것이 좋다 싶을 정도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이루어졌습니다.
더구나 일본어를 통역해주는 동료까지 같이 갔던 터라 그 배열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왼쪽부터 통역을 맡아 주신 동료 장윤석님, 우스이요시히토선생, 부인 우스이히사코(臼井久子)님.
이야기를 나누던 중 우스이선생이 통역 장윤석님의 일본디자인학교 선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맛있는 음식과 몇잔의 술이 돌아 갔고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1958년생. 우리 나이로 쉰을 갓 넘긴 선생은 후지산과 온천의 고장 시즈오카(静岡) 출신으로
현재의 사이타마(崎玉)현 카즈카베(春日部)시로 이주해 와 지금까지 그 곳에서 거주하고 계십니다.
1977년 카즈카베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슈퍼마켓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본 디자인학교를 다녔지만 곧 중퇴하고 광고회사에 취직하게 됩니다.
광고회사에 다니며 틈틈이 그렸던 만화 <타라쿠야 스토어 이야기/だらくやストア物語>를
1987년, 후타바샤(双葉社)의 주간 위클리 만화 액션 신인상에 응모,
입상하며 만화가로 데뷔하게 됩니다.
자신의 슈퍼마켓 아르바이트 시절을 소재 삼아 이끌어간 만화 <타라쿠야 스토어 이야기>는
5년간 연재하게 되지만 그리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는데,
우스이선생에게는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하게 됩니다.
<타라쿠야 스토어 이야기>를 진행하던 잡지사의 기자가
만화 속 '타라쿠야 스토어' 사장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를 관심있게 지켜 보다
새로운 작품을 제안했고 우스이선생이 이를 받아 들이며 새로운 만화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짱구는 못말려/크레용신짱>인 것입니다.
<인터뷰 도중 우스이선생이 직접 그려 가며 설명해 준 '타라쿠야 스토어 이야기'의 캐릭터.
타라쿠야 스토어 사장의 어린 시절로 '크레용신짱/짱구'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1990년 8월 처음 연재가 시작된 <크레용신짱/짱구는 못말려>.
왜곡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그대로 만화로 담고 싶었다는 선생은
자신의 만화에 쏟아지는 이런 저런 비판에 대해 명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냥, 그 나이 5살, 6살 남자 아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자세히만 들여다 본다면 그러한 행동들은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분명히 만화적 과장이나 유머가 지나치게 들어간 점은 없지 않지만 그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만 본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것을 통해 나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미운 일곱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드렸더니 바로 맞장구를 쳤습니다.
'크레용 신짱'의 '크레용'도 그냥 그 나이 때 아이들이
마음대로 그리고 환칠하는 이미지를 그대로 살려 붙인 이름이라 설명해 주었습니다.
'짱'이라는 말은 일본에서 어린 아이들의 이름 뒤에 붙여 부르는 '귀여운' 접미어로
억지로 번역하자면 '신군' 정도가 될까요?
그렇게 붙였던 '신짱'이 한국에 소개 되면서 '짱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이름 역시 이해하고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애니메이션은 1992년 처음 만들어 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애니메이션 작업에 우스이선생은 거의 관여를 하지 않는다는 것.
초기에는 아이디어 회의에도 참여하고 시나리오도 검토하고 했지만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작업에 있어서 선생의 역할은 '0'에 가까웠습니다.
자신이 캐릭터로 등장하기도 하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시사회장에서 처음으로 본다는 것도 또 다른 기쁨이라고도 했습니다.
의외다 싶어 집요하게 질문을 이어가자, 언제나처럼 대답은 명쾌하고 담백했습니다.
"다섯 명의 시나리오 작가가 한 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나보다 더 '짱구'를 사랑하며, '짱구'를 더 잘 이해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너무나 잘 해왔고, 앞으로 잘 해나가리라 믿는다... 애니메이션은 전문성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애니메이션을 잘 만드는 사람들이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건, 분명히 무관심도 아니었고, 방치도 아니었습니다.
인터뷰 내내 느꼈던 선생 특유의 '배려'가 아니었나 생각되어졌습니다.
마음씨 좋은 형님처럼 앉아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이 최고 인기의 만화가가
내 작품이다... 내 작품이니 손도 대지 말아라... 이건 저게 안되고 저건 이래서 안된다...
왜... 내 캐릭터 이름을 늬네 나라 식으로 마음대로 바꾸고 난리냐?
성내고 화내는 대신, 그 작업을 가장 잘 하는 이들에게 선뜻 맡겨 버리고 가만히 지켜 본다는 것...
그 결과물을 기분 좋게 들여다 본다는 것...
그러다, 문득 문득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는 것...
그게 우스이선생이고, 그게 '짱구' 아버지의 참 모습이었습니다.
TV 씨리즈를 포함해 일부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들쭉날쭉한 퀄러티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개성으로 이해한다고 했지만 조금은, 아주 조금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다시 만화 이야기로 돌아 갔습니다.
요즘은 일반인들도 많이 알고 있는 부분입니다만,
대개의 만화가들이 '문하생'이라 부르는 '어시스터'들을 두고 일을 하게 됩니다.
만화가는 중요한 구성과 데셍까지만 하게 되고
어찌 보면 단순 작업이랄 수 있는 먹선이나 배경 톤,
요즘 같으면 컴퓨터 작업들을 그들이 수고해주는 방식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스토리와 콘티도 별도의 인력에 의해 분업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생의 경우를 물어 봤더니 의외의 대답이 나왔습니다.
외부인은 일절 쓰지 않고 두 딸들이 작업을 도맡아 한다는 것입니다.
1달에 잡지 만화로 10페이지라는 그리 적지 않은 분량을 연재하고 있는데
딸 둘로 충분하다며 그 자랑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1달에 10페이지 분량이면 1년에 단행본으로 1권 분량.
2년 전까지만 해도 1년에 2권의 단행본을 묶어 냈는데,
그 때도 지금의 구성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상의 어떤 부모가 제 자식 이야기하는데 주저하겠습니까만은...
자신이 스토리와 연필 데셍까지를 마치면
우리 나이로 27살의 큰 딸 미코토(海琴), 22살의 작은 딸 미쯔키(海月) 둘이서
모든걸 척척 만들어 낸다는 설명을 하는 우스이선생의 표정은 살짝 들떠 있었습니다.
그러면 가족이 너무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냐는 농담에
'그렇게 되는건가?'라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20대 초반, 함께 슈퍼마켓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나 결혼한 동갑내기 부인은
딸 자랑에 조금 더 구체적이었습니다.
처음 <크레용신짱/짱구는 못말려>를 연재하면서는 어린 딸들이 역할 모델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어른이 되어 아버지의 충실한 어시스트 역할을 하고 있는 두 딸...
조금은 피곤해 보이는, 조금은 지쳐 보이는 선생의 미래를
'짱구'의 그림자이기도 했던 두 딸이 이어 나가는 것입니다.
말 잘듣고 성실한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하다 작은 딸 미쯔키의 어렸을 때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마치 일부러 그러는 듯, 하는 짓이 '짱구'와 어찌나 그리 닮아 있었던지...
거기다 목소리가 지금 '짱구'의 목소리를 더빙하는 성우를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도
그 목소리와 그리 똑같았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그저 웃고 신기해 하기만 했지만 많은 생각이 머리 속에 맴돌았습니다.
모든 창작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기반한다고 합니다.
바로 그렇게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스스로의 창작 의지로 묻어 나오며
우스이선생 모든 작품에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두 딸 이야기에 말이 점점 빨라지는 이들 부부를 보며
가족의 가치가 무엇인지 새삼 생각해 봤습니다.
음식은 너무나 맛났고 우리네 이야기도 점점 신이 났습니다.
옆 자리에 앉아 흘금 흘금 우리 이야기를 옅듣던 사람들이
일제히 '형님'들처럼 인사를 하고 악수를 청해왔습니다.
술 기운이기도 했지만 붉으스레한 선생의 얼굴이 더욱 홍조를 띄었습니다.
배가 불렀고,
술도 알딸딸하게 올랐지만 뭔가 아쉬웠습니다.
별도의 일정은 처리해두었던 터라 식사 자리 말미에 한국 음식을 먹어볼 생각이 없느냐 물었습니다.
이른 바 우리 식으로 2차를 간 겁니다.
2차는 푸짐한 감자탕에 동동주...
일전에 일본 손님과 우연히 들렀던 신주쿠 뒷 골목의 감자탕집...
그 일본 손님의 유난한 감동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던 터라, 괜찮을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돼지 등뼈에 감자가 푸짐하게 들어 간 감자탕집을 2차로 정했던 것입니다.
사모님의 한국 사랑도 그 결정에 한몫을 했습니다.
판에 박힌 김치며 불고기보다는 낳으리라 예상하고 말씀드린 터였는데
아니다 다를까 두분이 진심으로 감자탕을 좋아해 주셨습니다.
동동주, 막걸리를 주문한 것도 우스이선생이었습니다.
데판야키 집에서의 술들이 적지 않았지만 감자탕 집에서의 막걸리도 기분 좋게 상 위를 돌았습니다.
푸짐한 감자탕을 보고 놀라는 우스이선생이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습니다...
마치 디지털 카메라를 처음 가져 본 아이처럼 요리 조리 사진을 찍어 보는 우스이선생...
감자탕과 이 감자탕을 함께 먹는 외국인들이 재미있는지 계속해서 사진을 찍어댔습니다.
일러준대로 돼지 뼈를 손으로 들고 맛있게 감자탕을 즐겼습니다.
적절히 인사 치레가 섞인 말이 아니라 정말이지 감자탕을 맛있어 했습니다.
얼른, 어려운 질문을 꺼내 봤습니다.
"개인적으로 유명해졌고, 아주 부자도 됐을텐데... 솔직히 부럽다... 그런데, 우스이요시히토=크레용신짱 외에는 그 어떤 이미지도 성립하지 않고 있다... <짱구는 못말려/크레용 신짱>만으로 18년이다... 만화가로써 이건 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건 내가 그림을 잘 못그려서 그런게 아니겠는가?"
웃으며, 농담처럼 대답을 꺼내 놨지만 그것은 부끄러움보다 하염 없는 겸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실제로 우스이선생은 데뷔작 <타라쿠야 스토어 이야기/だらくやストア物語> 외에도
<파견의 여왕/あたしら派遣クイ-ン>, < 주식회사 복사뼈산업 24시/(株)くるぶし産業24時> 등의
작품이 있습니다만, 그 어느 작품도 '짱구'만큼의 인기나 영향력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만화가가 평생 하나의 작품만을 반복 재생산하는 것과
새로운 작품을 계속해서 발표하는 것 어느 것이 더 좋은가는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스스로 자신이 '그림을 잘 못그리기' 때문에 그랬노라는 선생의 가벼운 대답은
일견 다른 의미가 있는듯 했습니다.
실제 <크레용신짱/짱구는 못말려>에는
항상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반복되어 등장해 반복되는 에피소드들을 늘어 놓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18년째 여전히 다섯살인 '짱구'의 나이처럼 이야기는 고여 있지 않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짱구' 하나에 집중해 온 선생의 지난 18년이 거기 늘어져 있는 것입니다.
가볍게 보였지만 결코 가볍게 보이지 않았던 선생의 대답은,
결코 질문의 올바른 정답은 못되었지만 이 유명한 만화가의 고민을 옅보는 창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지난 밤 늦게 끝난 술자리 탓이기도 했지만 기분 좋음과 피곤함을 함께 감추지 못하는 우스이선생이
차근 차근 일을 정리하고 일종의 은퇴를 준비한다는 말을 꺼낸 것은
다음날 선생이 살고 있는 카즈카베에서의 만남 때였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18년을 '짱구' 하나에만 집중해 온 장인의 휴식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문학적 가치나 칭송 따위를 떠나 '만화'로서의 자기 사명을 다하며,
스페인, 네델란드 등 유럽에서 태국, 타이완, 중국과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수출되고
이제는 애니메이션, 장난감, 온갖 종류의 캐릭터 머천다이징 상품에 테마파크까지 만들어 낸 이후
그들 모두를 스스로의 생명이 있어, 자생적으로 흘러 가도록 '배려'한 다음
요 몇년 앞의 긴 휴식을 생각하는 우스이선생...
18년의 영광만큼이나 녹록하게 쌓인 스트레스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지금의 계약 관계가 정리되는대로 선생은 물러날 것 임을 밝혔습니다.
구체적으로 그게 몇년 후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 긴 시간은 아닌듯 했습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크레용 신짱/짱구는 못말려>에 나오는 '흰둥이',
'시로'를 데리고 산책하는 것으로 선생의 일정은 시작됩니다.
온천이 있는 카즈카베시를 누구보다도 사랑한다는 선생은
일주일에 두세번 그 온천에서 몸을 녹이는 것으로 쌓인 피로를 풀고 있었습니다.
사모님의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흰둥이/시로'의 사진.
완전히 가족의 하나가 되어 버린 흰둥이...
그 덤덤한 표정이 '짱구'네 마당의 그 무표정한 흰둥이와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둘째날의 점심은 선생이 가끔 찾는다는 한국 음식점으로 갔습니다.
일본 사람이 운영하는 한국 식당에서 일본 최고의 만화가와 한국 음식을 먹는다...
배달된 피자처럼 삼각형을 잘린 파전만큼이나 독특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국 드라마와 노래에 푹 빠진 부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작품이 한국에서 유난히 사랑받고 있는게 고마워서 그런지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 음식을 즐겨 먹는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20여개 국에 <크레용신짱/짱구는 못말려>가 수출되고 있지만
한국에서의 사랑이 가장 크다고 했습니다.
다음은 조금 의외로 스페인이었습니다...
스페인에서도 '짱구'는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했습니다.
몇번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때마다 느꼈던 한국 사람들의 친절도 인상 깊었다고 했습니다.
"짱구의 그 울라불라 춤은 어디서 왔나?"
"그냥 보통의 일본 아이들이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춤추는 것을 보고 그렸는데 의외의 결과를 봤다..."
"짱구의 결말은 어떻게 되는가?"
"아직 모르겠지만 곧 결말이 나리라 본다..."
"짱구의 행동에 비판이 많다... 아이들이 따라한다고 걱정하는 부모들이 있다..."
"특히 한국에서 그런 염려가 심하다는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 나이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가끔씩은 나도 그런 행동이 문제가 있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을 우스이요시토로 알고 있다... 요시히토가 맞나? 요시토가 맞나?"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등장할 때는 '우스이요시토'로 나온다. 본명은 '우스이요시히토'가 맞다. 일부러 그런건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이런 저런, 우문현답같은 이야기를 나누다,
"선생의 작품이 왜 그렇게 유난히 한국에서 인기가 많다고 보나?" 라 묻자
"솔직히... 잘 모르겠다..."가 선생의 첫번째 대답이었습니다.
이어서, 한국과 일본의 정서가 비슷하고 만화를 보는 세대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운 좋게 그렇게 되었다는 내용의 대답을 이어갔지만,
'잘모르겠다...' 어찌 보면 그 대답이 가장 우스이선생다운 대답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 흐르듯,
간간히 바람불듯,
결코 격하지 않게 이야기하며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조금도 거창해지지 않으며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이 사람...
내가 정말로 그렇게 유명한 만화의 창작자를 만나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선생의 영혼은 순수하고 맑아 보였습니다.
식사 전 함께 들렀던 '크레용신짱/짱구는 못말려 테마파크'에서 혹여 아이들이 다칠까
유심히 지켜 보던 그 선한 눈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마지막으로 싸인을 부탁했습니다.
선생께서 한 수 더 떠서 한글로 내 이름을 적어보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만화가라할 수 있는 이 분이
온전히 하루 반나절의 시간을 빼먹은 외국인을 위해 식사를 하며 싸인을 해줍니다.
알지도 못하는, 암호같은 외국 글자를 그려 상대방의 이름을 적어 줍니다.
수줍게, 책상 아래로 종이를 숨겨 쓰윽 쓰윽 그림을 그려 주십니다.
대체 뭐라고 고맙다 인사를 전해야 할지...
평가를 떠나,
가치를 떠나,
당대의 가장 높은 자리와 인기에 오른 분의
사람됨과 겸손함과 배려의 정신을 읽을 수 있는 그런 빛나는 자리였습니다.